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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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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1. 10. 11, 전북 고창
사망 1955. 2. 18, 서울
국적 한국

요약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산업진흥에 의한 민족자본의 육성,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노력했다. 191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에 졸업했다. \"신문화에 의한 민력배양을 바탕으로 한 민족독립\"이라는 신조를 갖고 졸업 무렵에는 일본의 문물을 시찰한 후 귀국했다.
1915년 운영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를 인수했고, 1919년에는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했으며,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1932년에는 설립 이래 계속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맞섰다. 해방후에는 송진우와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했으며, 1951년에는 제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인촌(仁村). 경중(暻中)의 아들이다.

3세 되던 해 백부 기중(祺中)의 양자가 되어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907년 영어학숙(英語學塾)에 다니면서 송진우(宋鎭禹)·백관수(白寬洙)와 함께 변산(邊山) 태호사(泰護寺)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 긴조[錦城] 중학교 등지에서 수학했다. 1910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에 졸업했다. "신문화에 의한 민력배양(民力培養)을 바탕으로 한 민족독립"이라는 신조를 갖고 졸업 무렵에는 일본의 문물을 시찰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민력배양을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산업진흥에 의한 민족자본의 육성, 언론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 등이었다.

1915년 4월 운영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에는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를 창립하여 민족자본 육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 4월, 3·1운동을 계기로 형성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를 육성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계몽에 힘썼다.

당시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사가 사원들의 월급도 지불하지 못하는 경영난에 빠졌을 때 사재(私財)를 털어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했다.

특히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과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등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4년 〈동아일보〉의 송진우·최원순(崔元淳), 천도교의 최린(崔麟)·이종린(李鍾麟), 〈조선일보〉의 신석우(申錫雨)·안재홍(安在鴻),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대구의 서상일(徐相日), 평양의 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결성하려 했으나 사회주의자와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의 반대로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2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으며, 1932년 3월에는 재정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했다.

문화재 수집에도 관심이 있어, 학교 도서관에 비장할 고서(古書)와 박물관에 진열할 골동품 수집하기도 했다.

1935년 3월 '조선문화 향상을 위해 도서 출판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고, 11월에는 경기도청이 주도한 소도회(昭道會)의 이사로 선입되었는데, 이 조직은 경기도내의 사상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 보호가 목적이었다.

이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는데, 1937년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후 7월 30일과 8월 2일에 경성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중일전쟁의 정당함을 선전하는 시국강좌를 했고, 8월 중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그리고, 9월 전조선시국강연대에 참가 강원도 일대에 시국강연에 나섰으며,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 이사를 맡는 등 친일 조직에 가담했다.

조선 청년들을 대상으로 징병제가 실시되자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 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했고,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 다시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글을 실어 조선 학생들이 일본군에 학병으로 지원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에도 〈경성일보〉, 〈매일신보〉를 통해 학병 미지원자의 원칙적 징병을 주장하고, 영광스럽게 입대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민족적 친일행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

8·15해방이 되던 해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송진우와 함께 보수우익세력의 정당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 수석고문을 지냈으며, 1946년 1월에는 당시 한국민주당의 당수이던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맡았다.

정치가로서의 김성수는 민족독립과 민주정치의 구현을 위해 언제나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단결을 추진하는 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여겼다.

1946년 동아일보사 제9대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해 9월 한국민주당 당수, 1947년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한 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의 뒤를 이어 1951년 5월 15일 제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반대하여 1952년 5월 29일 격렬한 문구로 된 장문의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면서 이승만정권 타도에 앞장섰다.

1955년 심근염(心筋炎)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어 고려대 뒷산에 안장되었으나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10월 18일 고려대 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어 그의 뜻을 기리고 있으며 1991년 11월 11일 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는데, 친일 행적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동상 철거와 함께 서훈 취소에 대한 논의가 일기도 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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