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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가 활동할 무렵, 우리글과 역사에 대한 연구도 활발했어요. 역사와 글을 통해 우리 민족성을 일깨우려고 했지요.
주시경의 한글 사랑
세종 대왕이 발명한 ‘훈민정음’은 한문에 밀려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다 1894년에야 ‘국문’이라는 이름을 얻었어요. 국어 교과서도 이 즈음 만들어졌어요. 나라에서는 공문서에 국문을 두루 쓰겠다고 발표했어요. 그나마도 잘 지켜지지 않아서 국문과 한문을 섞어 써야 했지요.
한글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896년, 독립신문이 발행되면서부터예요. 독립신문은 순 한글로 기사를 썼고 띄어쓰기를 했어요. 그러자 백성들은 여러 가지 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었지요.
이 무렵 주시경은 독립신문에서 일하며 한글을 가르치고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열심이었어요. ‘언문쟁이’, ‘돈벌이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비아냥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히려 주시경은 우리 민족이 한글의 가치를 모른다며 안타까워했어요.
“우리글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과학적인 글입니다. 외국인들도 문자를 발명한 일은 세계적인 자랑거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의 가치를 모르고 있으니 매우 섭섭한 일입니다.”
주시경은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서울의 중학교 열여덟 곳을 돌아다니며 국어 선생님으로 일했고, ‘조선어 강습원’을 세워 일요일마다 한글을 가르쳤어요. 주시경은 각 학교에서 가르칠 책을 커다란 보자기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다녔어요. 그래서 ‘주 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1914년, 나라 밖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치려다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신채호의 완전한 역사
신채호는 특히 우리나라 고대사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단군을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연 역사적인 인물로 보았고, 고구려 유민(망한 나라의 백성)이 세운 발해를 높게 평가했어요. 신문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단군부터 발해까지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신채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어요. 1910년, 나라 밖으로 망명했을 때 만주에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직접 살펴보며 역사 연구를 계속했어요.
신채호는 역사 연구를 하기 전 신문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논설을 썼고 주시경과 함께 ‘가정잡지’라는 여성용 한글 잡지를 펴냈어요.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할 때 영국인 사장 베델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유학을 권했지만 신채호는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할 거라며 거절했습니다.
1910년 안창호 등과 망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지요.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 때 참가했고 그 뒤 군사 행동으로 일본과 맞서기도 했습니다.
신채호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이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며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할 정도였어요.
신채호는 군사 투쟁을 벌이기 위해 돈을 마련하려다가 1928년, 대만에서 체포되었어요. 그 뒤 뤼순 감옥에 갇혔다가 병이 나고 말았지요. 일본은 신채호를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감옥에서 내보내 주겠다고 했어요. 친구들이 친일파였던 신채호의 친척을 찾아 도움을 부탁했지만, 신채호는 친일파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거절했어요.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차디찬 감옥에서 눈을 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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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재를 통해 근대의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면서 힘든 시절을 당당히 헤쳐 온 우리 민족의 힘을 느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개화파 쳥년들의 운동부터 통일을 위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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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민족의 혼을 지키는 우리글, 우리 역사 – 문화재로 배우는 근대 이야기, 신연호,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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